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녹산의 난 (문단 편집) ==== [[장안]]을 점령한 반군 - 반란의 전성기 ==== 동관을 돌파하고 황실을 변방으로 쫓아보내며 장안을 점령한 것은 756년 6월 말. 이후 757년 8월 완전히 재건된 당 중앙군이 장안, 낙양 탈환에 나설 때까지의 1년여가 '''[[안사의 난]]의 전성기이자 [[당나라|당]]의 최대 위기'''로 평가된다. 이 시기 안녹산은 태원을 제외한 당의 핵심지역을 모두 함락시켰을 뿐 아니라 이 전과로 인해 하북 일대에서 당에게 귀부하던 세력들이 다시 안녹산에게 돌아서 세력이 확대되었고 혼란으로 인해 중앙정부가 마비되어 정국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안녹산이 조금만 더 장기적 안목이 있었다면 이 1년, 아니, 안녹산이 아들에게 살해당하기 전까지인 6개월 안에 '''[[당나라|당]]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연(안사의 난)|연]] [[왕조]]를 수립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나라에게는 천만다행으로 '''[[그런거 없다|안녹산에게는 그런 안목이 없었다.]]''' 안녹산은 당 조정이 6월 13일에 장안을 떠난 것을 진작에 알고도 최건우에게 명령해 일시 정지했다가 10일이 지난 후에야 손효철에게 병력을 맡겨 장안을 점령한다. 이때 장안을 떠나지 않았던 변령성(고선지의 죽음의 원인제공자)이 장안성 황궁의 열쇠를 들고 항복한다.(변영성은 후에 장안을 탈출해 숙종에게 도망쳐오나 그대로 처형당한다.) 또한 장안을 점령한 후에도 추격군을 편성해서 당현종을 쫓지 않고 안녹산은 낙양에 머물며 ~~군기가 빠져~~ 향락을 즐겼다. 그 결과 장안 인근 관중지역조차도 제대로 장악이 안 된 상태여서 관중 일대에서는 자주 '태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고, 이 소식을 듣고 용기를 얻은 관중지역의 주민들이 안녹산군을 공격하는 경우가 빈발했다고 한다. 간간히 [[칙령|칙서]]와 비단 재물을 사신들에게 들려보내 당에 충성하는 지방을 매수하려고 시도했을 뿐이나 그냥 보낸 사신의 목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나 당의 상황 또한 결코 낙관적이지 못했다. 일단, 하북을 보자면 곽자의, 이광필이 귀환함으로 인해 범양의 강병을 지휘하던 사사명은 박릉에서 섬멸당할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이후 박릉에서 군을 재정비하고 다시금 하북평정에 나선다. 때마침 평로절도사 유정신이 안녹산을 배신하고 범양을 기습하려 하자, 이는 안녹산의 세력기반이 사실상 범양 일대로 축소됨을 뜻했기 때문에 사사명은 일단 이것부터 격파한 후 하북으로 전진해 나갔다. 곽자의, 이광필은 박릉에서 철수하면서 신도태수 [[오승은]]에게 삭방의 병사 3천여를 남기고 안진경, 하란진명[* 안진경에게 합류한 인물로 군사적 재능이 있었는지 안진경은 그에게 자신이 이끈 의병의 지휘권을 전담시켰다.]과 협조해 하북에서 사사명을 억제할 것을 명했으나 사사명에 의해 별 저항도 못하고 항복했다.[* 사사명은 오승은을 상당히 후대했는데, 이는 다른 비슷한 장수들의 운명을 보면 운이 좋아야 억류당했다 살해당했던 걸로 끝난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사사명이 오승은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인맥빨~~ 그러나 사사명의 재봉기 당시 오승은이 당 조정의 명에 따라 사사명을 제거하려 시도하다가 사사명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후 사사명은 [[고성]]을 함락시켰고 9월, 조군과 상산을 함락시키며 태원으로 가는 길목을 다시 확보한다. 그 후 11월에 하란진명이 조정에 입사하고 곧 하남절도사로 임명되는 사이 사사명은 안진경이 이끄는 의병과 맞부딪친다. 안진경은 상당히 분전했으나 애초에 의용병 내지는 단련/단결병(자경대)가 주류인 안진경의 군대로써는 동북방의 강병과 이민족군의 혼성으로 이루어진 사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은 자명했다. 결국 평원까지 함락되자 안진경은 [[황하]]를 건너 [[형주]]로 몸을 피했다가 다음해에 조정으로 입사한다. 이후 755년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서도 1년이 넘게 저항하던 요양까지 함락되고 이를 지키던 [[장흥]]이 사사명에 의해 톱으로 머리를 썰려 참수당하는 것으로 결국 하북의 전황은 종결된다. 안진경이 이끌던 의병군의 참패와 소멸은 곧 안녹산군의 하북 재평정을 의미했으며, 하북에서 당에 충성하며 저항하던 세력 전체가 궤멸당한 것을 의미한다. 이후 사사명의 난 시기를 보면 하북에서의 저항은 조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북지역은 안녹산-사사명군에 의해 평정당했다. 이후 사사명은 그 다음해인 757년 1월, 채희덕, 고수암, 우정개와 함께 당의 3경 중 마지막으로 당의 손에 남아있던 태원 공략에 나서 이광필과 다시 한번 맞부딪치게 된다. 하남지역에서는 양경의 함락과 이에 놀란 하남 일대의 [[군현제|군현]]들이 안녹산에게 대거 항복하는 가운데 사실상 안녹산세력 한가운데인 옹구([[하남성]] 기현)에서 버티고 있는 장순의 활약이 이어졌다. 현종의 파천소식이 전해지자 항복을 건의했던 6명의 휘하 장수들을 과감히 ~~[[E]]를 때려서~~ 처형하여 병사들을 다잡은 장순은 영호조의 공격을 거듭하여 막아냈으며, 3천여 명의 수비병력만으로도 오히려 몇 차례나 역습을 가해 패퇴시키고 만여 호를 다시 귀부시키는 공적도 쌓았다. 안녹산이 임명한 하남절도사인 이정망이 이민족이 포함된 병력 2만여로 접근해오자 초전에 바로 야습을 걸어 패배를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모의 차가 현격하기에 완전히 격퇴할 수는 없었으며, 거듭된 전투로 인해 3천이던 병력이 12월에는 1천까지 감소한다. 결국 안녹산군이 지속적으로 공세를 걸고, 또한 안녹산의 장수인 양조종이 옹구에서 후방으로 물러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인 영릉을 2만여 병력으로 공격하려 하자 결국 장순도 옹구에서 영릉으로 철수, 수양태수 허원과 합류해 양조종을 격퇴했다. 비록 옹구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분전했다고 여겨졌는지 장순은 이후 하남절도부사로 임명된다. 또한 이 시기 아사나종례가 안녹산군을 갑작스럽게 이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사나종례는 안녹산군에 소속되어있던 돌궐족의 추장으로써 돌궐족 병사들을 지휘했는데 7월 22일, 아사나종례가 자신을 따르는 돌궐 기병 5천여 명과 마필 2천여 필을 훔처 삭방군 쪽으로 이탈한 것이다. 아사나종례의 의도는 삭방군 변방의 구성부와 [[오르도스|알더스]] [[고원]]에 당이 사민시켰던 돌궐, [[철륵]] 동라 등 여러 이민족들을 선동해 봉기시키고, 이들을 지휘해 당의 변방지역을 장악하고 유력한 대외 세력으로 성장하고자 함이었던 돌궐부흥운동으로 추정된다. 돌궐 제2제국이 멸망한 후 [[위구르|회흘]]이 아직 [[몽골 초원|북방 초원지대]]의 패권을 잡기 이전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돌궐]][[부흥운동]]은 당에게는 또 하나의 중대한 위협이었다.''' 당숙종은 삭방진, 안서4진, 하서진 등 서북쪽 일대의 번진들을 주축으로 삼아 군을 재건하고 또한 이민족 사역군 및 지원군을 받아들여 군을 증강시키고 있었는데, 아사나종례의 의도가 성공할 경우 '''왕년의 [[돌궐]] 제국이 [[중흥]]하여''' 서북 쪽 번진지역의 군대를 동원하기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이민족 병사들도 그 수가 크게 감소할 것이기 때문. 따라서 당숙종은 9월, 곽자의, 복고회은으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아사나종례를 토벌할 것을 명했고, 복고회은의 아들인 복고빈이 동라에게 패해 사로잡혔다 탈출해 돌아오자 자기손으로 처형할(!) 정도로 군기를 다잡은 복고회은의 활약으로 아사나종례가 이끌던 동라-돌궐집단은 격파되었으며, 12월 회흘의 지원병력까지 인수한 곽자의가 다시 한번 유림하 북쪽에서 동라를 필두로 하는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들을 다시한번 격파, 참수 3만에 포로 1만이라는 큰 전과를 거두고 영무로 귀환한다. 또한 [[강남(중국)|강남]]지역에서는 영왕 [[이린]]이 [[분리주의|분리독립]]할 생각을 가지고 세력을 확대하려는 기도가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번외항목으로 따로 기술한다. 장안이 함락되고 하북이 다시 사사명의 손에 들어가며 하남지역에서도 안녹산의 세력이 확대되고 서북쪽 변방에는 아사나종례의 동라-돌궐집단의 발호가 일어나는 데다 강남에서는 영왕 이린이 자립할 야심을 가지자 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한 후의 전황은 결코 [[영 좋지 않다|영 좋지 못했다.]] 이에 당숙종은 이를 한번에 뒤집으려는 도박수를 두게 된다. 756년 10월 [[방관]]의 지휘하에 병력을 편성, 장안을 탈환하려 시도한 것이 바로 그것. [[방관]]은 이시대에 이름이 상당히 잘 알려진 문사로, 청담을 즐기며 빈객을 좋아하고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과 교유관계를 원활히 유지해 그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9월 말에 당숙종이 황제임을 인정하는 조서와 [[옥새]]를 들고 합류하자 바로 [[재상]]직에 임명할 정도였으니 그 명성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관이란 인물의 실상은 꽤 한심했다. '''[[입스타|빈객을 잘 끌어들이고 인맥을 유지하여 명성을 얻었을 뿐 군사적, 행정적 재능은 전혀 없는 무능한 인물]]'''이었던 것.(...) 9월에 합류한 이후 그 명성으로 인해 당숙종의 신임을 얻자 때마침 조정에 입사한 북해태수 하란진명이 방관에 대해 '''저거 순 [[왕연]] 같은 놈'''이라고 평할 정도였던 것.[* 왕연은 [[청담사상]]가로, [[영가의 난]]으로 [[서진]]의 멸망을 가져온 주역 중 하나다.] 10월, 이 방관은 스스로 장안과 낙양을 수복하겠다면서 당숙종에게 청을 올리고, 당숙종은 이를 받아들여 지절·초토사경검방어포장양관절도등사(길기도 하다. 뜻은 '서경을 불러 토벌하고 포관과 장(동)관 두 관문을 방어하는 병마사 및 절도사'가 되겠다.([[권중달]] 교수의 주석))직을 제수한다. 이에 방관은 자신을 보좌할 참모들을 자신이 뽑겠다고 나서 어사중승 등경산, 호부시랑 이읍, 급사중 유질을 참모로 삼았다... 문제는, 방관이나 방관이 뽑은 참모들이나 죄다 '''[[백면서생]]에 불과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유유상종]]~~ 당숙종도 이게 염려되었는지 병부상서 왕사례로 하여금 방관을 돕게끔 했으나 방관은 숙장인 왕사례의 도움을 깨끗하게 무시한 듯 싶다. 방관은 군(전후 사정으로 볼 때 6~7만은 되는 듯 싶다. 꽤 대규모 군대다.)을 정석적으로 3군으로 나눠 양희문, 유귀철, 이광진(이광필의 동생)에게 맡겨 진격한다. 11월 20일 즈음에 함양에서 안녹산군과 접전을 벌였는데, 방관이 어디서 본 건 있었는지 '''[[조괄|옛 병법을 따르겠다면서 우마차 2천승을 준비]]'''해 내세우자 안녹산군은 간단히 그 우마차를 불태워 소들을 폭주하게 만들어 당군을 대패시킨다. 첫 전투에서 '''[[똥별|사상자가 4만]]'''이었다고 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방관은 23일에 남은 군을 추스려 다시 한번 도전했으나 간단히 박살이 나고 양희문, 유귀철은 안녹산군에 항복한다. 이에 당숙종은 매우 분노했고 방관을 계속 재상직에 남겨는 놓았지만 실상이 드러난 이 인간을 더이상 신뢰하지는 않았다. 이후 방관은 --정신 못차리고-- 정국을 다시 주도해 보려고 하나 당숙종은 다시는 그를 쓰지 않았다. 이는 간신히 재건되던 당 중앙군 전력을 다시 한번 약화시켜 후에 이민족 병력, 특히 회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낳는 한 요인이 되었다. 이 해에 당은 북해절도사, 상당절도사, 흥평절도사직을 설치했다. 이러한 '''내지절도사'''의 설치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남양절도사, 하남절도사, 산남서도절도사, 산남동도절도사, 관내절도사, 회남절도사, 회남서도절도사, 경기절도사, 동기절도사, 청밀절도사, 상당절도사 등 '''당 대부분의 지방이 [[절도사]]들의 지배권에 들어가게 되며, 기존의 지방행정체계는 절도사들의 [[번진]]체계에 흡수되어 버린다.'''[* 이는 안사의 난 진압 이후에도 [[복고회은의 난]], 사진의 난, [[주차]]-[[이회광]]의 난 등으로 대표되는 '''당 중후기의 연속적인 번진 반란이 일어나는 근본 요인이 된다.''' 또한 과도하게 늘어난 절도사들과 그들이 지휘하는 군사력은 당의 재정상황을 심각하게 압박하며 이를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증세는 결국 당의 멸망을 가져오는 '''[[황소의 난]]'''이 일어난 근본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외에, [[개원]]~천보 연간 동안 강화된 당의 군사력에 의해 억눌러져 있던 토번은 안사의 난으로 당의 주력군이 반란 토벌을 위하여 내지로 이동한 틈을 타 다시금 쳐들어와 위융, 신위, 정융, 선위, 제승, 천성 등의 군진과 석보성, 백곡성, 조과성 등 당에 의해 빼앗겼던 요충지를 공략해 빼앗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